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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인생인가. 많은 신중년이 이런 고민을 하며 행복하기 위한 답을 찾는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불가피하게 남들보다 더 늦도록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이도 있고, 준비 없이 닥친 은퇴에 당혹스러워하는 이도 있다. 여기 이 사람은 어쩌면 남들보다 곱절 이상 행복해 보인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행복일까. 그렇지는 않다. 은퇴 후 이렇게 살려고 간절히 준비했으므로. “아빠! 아빠 이야기를 한번 써보세요”이양우(62) 씨는 몇 달 전 인근에 사는 딸의 전화를 받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신중년 수기 공모’가 붙었다면서 아빠의 인생을 써보면 좋겠다고 했다. 한번 그래 볼까~. 노트북을 펼쳤다. ‘내가 살아온’ 얘기이니 놀랍게도 술술 써졌다. 앉은 자리에서 한번 만에 쓱 쓰고 그냥 응모했다. ‘취미가 인생2막의 마중물이다~!’가 제목이다. 내 얘기를 쓰고 보니 어쩐지 민망해 두 번 읽지도 않았다. 그랬는데, 최우수상을 받았다. 내가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인정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시상식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인사했더니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말도 잘한다고 치켜세워줬다. 그림 그리고 싶었으나, 생계 위해 ‘법’ 전공김해 진영이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 미술대회에 나가면 언제나 상을 받았다. 그림 그리는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고3 시절 대학 진학을 앞두고 망설였다. 가족 부양하며 살아가려면 먹고살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취업이 잘되는 법대로 갔고, 법 관련 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됐다. 2년 전 은퇴하기까지 그렇게 조직에 얽매여 33년을 성실히 살아냈다. 직장생활 하면서도 이어간 ‘화가의 꿈’그는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 퇴근하면 학원으로 달려갔다. 미술치료사 공부도 했다. 결국 대학원 진학도 했다. 대학원에서는 그토록 원하던 미술을 전공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주관하는 근로자 예술제에 매년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고, 수상경력도 차곡차곡 쌓였다. 40대에 정식 화가가 됐다. 부산미술협회 회원이 되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개인전도 1회 열었고, 단체전도 참가했다. 복지관 등에서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재능기부도 하며 의미 있게 살았다. 이 재능 기부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은퇴자금으로 고향 진영에 화실 마련, 제2인생그는 남들보다 2년 먼저 은퇴했다. 고향 후배가 소개한 촌집을 구입하고 화실을 꾸미면서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은퇴자금을 들여 100여 평의 50년 된 촌집을 사들여 개조했다. 화실 이름은 양지화실. 양지마을 이름을 땄다. 7월 초 햇살이 제법 따갑던 날, 취재진이 양지화실을 찾았다. 진영 중심가에서 5분 거리고, 봉하마을도 가깝다. 마을 입구, 그가 그렸다는 벽화가 반긴다.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화분에 작은 분수대를 만들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원한 음료를 내오는 손길이 섬세하다. 주인을 닮은 촌집의 화실 공간은 알맞게 적당하고, 깻잎·고추·상추가 심긴 텃밭이 단정하다. 골드 메리, 사계 장미, 백일홍, 송엽국이 화사하다. 그는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마당 감나무엔 감이 제법 열렸다. 화실 안은 수채화 그림으로 가득하다. 은퇴 후 배웠다는 캘리그라피 그림도 근사하다. 수채화에 캘리그라피를 더한 그림은 그가 나름대로 개척한 자신만의 작품세계다. 마을 입구에 그린 벽화도 그런 형식이다. 호평을 받는다고 한다. 그림 이야기를 하자 그의 눈이 더 반짝인다. 서양화가인 그는 유화도 그리고 수채화도 그린다. 화실에선 수채화를 주로 그린다. 준비하고 치우는 데 번거로운 유화는 집(장유)에서 한다. 화실에는 주로 오후에 나온다. 오전엔 산에도 가고, 24개월 된 손주 재롱도 봐야 한다. 내년쯤 예상하는 개인전 준비가 한창이다. 화포천, 양지마을, 주남저수지 등등 김해와 인근 풍경을 많이 그려놓았다. “돈벌이 않고 재능기부하겠다”는 다짐 실천, 지금이 가장 행복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밥벌이를 위한 돈벌이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부양할 부모님 이미 안 계시고, 자녀는 독립해서 부담이 없는 ‘(남보다) 좋은 조건’ 덕택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은퇴 후 하는 미술 활동은 대부분 재능기부 성격이다. 양지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양지마을 벽화를 그리게 됐는데 그 또한 재료비 정도만 남기고 모두 동네 어르신을 위해 써달라고 기부했다. 양지마을에는 노인들이 많다. 이곳에 화실을 연 후 노인 미술치료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올해 하반기 윗마을 양지마을에도 벽화를 그릴 예정이다. 재능 나눔은 진행형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은퇴 후의 삶을 오래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주위를 보면 은퇴 후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분들 많으십니다. 저처럼 취미를 하나 만드시는 것은 어떠실까요. 그리고 나름의 목표를 갖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보십시오. 중도에 그만두지 마시고 프로가 될 때까지 도전하시면 언젠가는 꿈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취미는 인생2막의 마중물이랍니다.” (경남공감 2021년 8월호) 글 박정희 사진 김정민
21.08.23. 농사의 ‘ㄴ’자도 몰랐던 초보 농사꾼이 판을 벌였다.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토마토에 좋아하는 음악 장르인 힙합을 입혔다. 바로 HIP한 토마토 ‘힙토’다. 더불어 주변의 농부들과 함께하는 방식도 고민 중이다.천편일률적인 농산물 판매가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힙토’ 박지현(26·진주) 대표를 만났다. 대추방울토마토 키우는 초보 농사꾼박지현 씨가 대추방울토마토 농사를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부모님께서 오랫동안 애호박과 토마토 농사를 짓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란 박 씨는 ‘농사는 힘들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농사보단 농업 유통 쪽을 배워보고 싶었다. “농부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배추를 수출하는 회사에 실습하러 갔을 때였어요. 농업 유통업에 관심이 있어 대표님께 여쭤보니 농사를 짓고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길로 진주시 대산면에 있는 부모님의 농장 옆 비닐하우스 한 동을 빌려 대추방울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토마토와 힙합의 만남 ‘힙토’ 탄생 “비닐하우스 한 동인 500평도 초보 농부에겐 힘들더라고요. 주변의 후계농은 5000평, 7000평 하다 보니 그분들이 대기업이라면 저는 완전 영세업자 정도였죠. 똑같은 방식으로는 경쟁이 안 되겠다 싶어 다르게 해보자 했어요.”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힙한 토마토 ‘힙토’다. 농산물에 브랜드를 입혀 홍보하는 것이다.“농식품 전문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할 때였어요. 당시 대표님과 대화 중 토마토를 어떻게 판매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하자 대표님께서 ‘지현 씨 힙하잖아요. 힙한 토마토 어때요? 힙토!’ 이거다 싶었어요.”그렇게 힙토가 탄생했다. ‘hip’하다에서 ‘hip’은 앞서 있는, 유행에 밝은, 통달한 뜻으로 평소 힙합을 좋아하는 본인을 캐릭터화했다. 물론 처음부터 원하던 캐릭터가 나오지는 않았다. 디자인 업체도 변경하고 4번의 캐릭터를 엎은(?) 후에야 지금의 캐릭터가 탄생했다. 이후 박 씨는 힙토 캐릭터를 바탕으로 다양한 굿즈(특정 브랜드의 기획상품)를 만들었다. 그립 톡, 에어팝 케이스, 컵, 볼펜, 엽서, 티셔츠 등을 제작해 토마토와 함께 홍보했다. 품질 좋은 토마토, 브랜드 입힌 굿즈… ‘힙토 팬’을 만들자기존의 토마토 판매 방식은 농산물 도매시장과 농협, 지인들 판매로 오프라인이 60~70% 차지했다. 박 씨는 ‘농산물 가치는 농부가 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직접 가격을 결정해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비중을 늘리고 싶었다.“네이버 스토어팜에서 토마토를 판매하고 있지만, 비중이 작아요. 또 청년 창업농으로 지원받고 있어서 농산물과 가공식품만 판매합니다. 힙토 굿즈는 진주시 비단길 청년몰 힙토 상점에서 판매하고 있죠.”박 씨는 토마토와 굿즈를 동시에 판매하기 위해 농업 법인회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더불어 홈페이지도 제작하고 있다. 또 혼자 사는 사람들 대상으로 500g, 700g의 소포장과 함께 굿즈를 판매할 수 있는 카카오 메이커스 입점도 신청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진행돼 정신이 없어요. 그래도 하나하나 체계를 잡고 성장하고 있는 듯해 기분 좋아요. 지난해보다 매출도 좋아지고 있고, 힙토를 알아봐 주시는 분들도 확실히 많아졌어요. 온라인의 경우 힙토를 검색해서 구매하는 분들이 대추방울토마토를 검색해서 들어오는 분보다 훨씬 많고요.”박 씨는 토마토의 맛과 품질은 기본이고, 힙토 브랜드를 입혀 힙토팬이 고객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매진할 생각이다. ‘힙토와 친구들’ 협업으로 성장하다“힙토 토마토 출시 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분은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를 하는 분이셨는데, 귤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고 싶다고,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죠.”바로 함께하자고 답했다. 박 씨는 ‘힙토와 친구들’이라는 명칭으로 6가지 귤 품종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어 본인의 네이버 스토어팜에 소개했다. 결과는 대성공. 자신의 토마토보다 감귤이 훨씬 더 많이 팔렸다. 수익 배분은 수수료로 진행했으며,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됐다. 박 씨는 감귤을 판매하면서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상품을 발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다 보니 디자인도, 마케팅도 한계가 있었어요.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부와 함께 판매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협업의 절실함을 느꼈어요.” 힙토 생태계를 꿈꾸다 박 씨는 감귤을 판매한 경험으로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지인께서 경남청년네트워크를 추천해 주셨어요. 혼자서 농사짓고 상품을 판매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원했고, 결과적으로 농업팀장도 맡게 됐어요. 많은 사람을 알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큰 용기를 냈죠.”이후 박 씨는 지난 6월 경남도에서 주관한 ‘경남청년협업네트워크 교류회’에 참여해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낸다. 교류회를 통해 알게 된 진주대학생연합봉사단 위더스 이용진 회장과는 ‘20대들이 즐길 수 있는 농업축제’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도 나눴다. “서울에서 열리는 ‘청춘페스티벌’처럼 청년들이 먹고 놀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경남에도 있었으면 해요. 그 주제가 농업이 된다면 정말 재밌겠다고 이야기했었죠. 매번 혼자서 일을 진행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진행할지 몰라 어려웠는데, 교류회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진행하니 더욱 성장하는 것 같았어요.” 이처럼 박 씨는 초보 농사꾼에 이어 힙토 대표, 경남청년네트워크 농업팀장으로 하루하루가 바쁘다. 토마토 수확이 끝난 지금은 ‘힙토와 친구들’ 캐릭터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주변의 농부들과 함께 다양한 농작물을 판매할 수 있는 ‘힙토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온라인 마케터 양성교육과 귀농 귀촌 창업 교육도 열심히 받고 있다. “이제 시작하는 초보 농부들은 정말 힘들어요. 협업해서 똘똘 뭉쳐야 시너지효과가 발생할 것 같아요. 가까운 미래에 ‘힙토 생태계’를 꼭 탄생시키고 싶어요.” (경남공감 2021년 8월호) 글 배해귀 사진 김정민
21.08.23.설립 21주년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오랜 시간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유적·유물을 세상 밖으로 옮기는 일. ‘발굴’의 의미다. 이 발굴 현장에서 흙을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긁어내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이들이 있다.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직원들이다. 역사문화센터 설립 21주년이 되는 7월을 맞아 경남 역사의 흩어진 조각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발굴조사 현장을 찾았다. 땀 흘리며 세상 밖으로 역사를 꺼내는 발굴“조심스럽게 발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유적·유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지난 6월초 함안 가야읍 광정리, 아라가야의 옛터로 불리는 함안 성산산성 18차 추가 발굴 현장. 직원들은 발굴에 여념이 없다. 이재명(40) 조사연구위원 팀장은 호미로 성벽에 묻은 흙을 걷어내면서 발굴 작업이 매우 까다롭다고 했다. “발굴이라고 하면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으로 생각하실 텐데요, 사실 굉장히 민감한 작업입니다. 정해진 기간 내에 발굴조사를 마무리해야 하고, 유적·유물을 잘 보존해 발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름에는 폭염, 겨울에는 한파로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유적·유물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고 했다.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는 지난 1991년부터 이어진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를 2019년부터 도맡아 진행하고 있다. 이 팀장은 “성산산성은 유적으로서의 의미가 큽니다. 6세기 중엽, 가야에 진출한 신라가 쌓은 아주 큰 산성 중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사용했어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이 어떻게 변했는지 규명할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죠”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580여 점의 목간(글을 적은 나뭇조각)은 당시 함안의 문화상과 역사상을 밝혀내는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유적·유물 발굴 = 잃어버린 경남의 역사 복원’이라는 등식이 과하지 않아 보인다. 가야사 복원 성과 차곡차곡, 경남 역사 새로 쓰다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는 지난 2000년 7월 가야문화센터로 출발해 이듬해 역사문화센터로 변경됐다. 경남의 문화재를 조사·연구하는 이곳은 역사문화 정책연구뿐만 아니라 가야사 복원사업과 가야유적 조사와 연구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총 27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그중 24명은 발굴조사에 임하고 있다.고민정(46) 센터장은 “지난 2019년 창녕 계성 고분군·함안 가야리 유적, 2020년 거창 거열산성의 국가사적 지정 및 승격 사업을 이뤄냈어요. 가야사 복원사업의 큰 성과입니다. 또한 가야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도 지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순히 유물을 찾는 과정을 넘어 경남의 역사를 새로이 쓰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역사문화자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연구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경남의 역사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며, 후대에 보다 안전하게 전해지기를 소망해본다. (경남공감 2021년 7월호) 글 배해귀 사진 김정민
21.07.09.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통영의 한 바닷가 마을 골목 안을 파고든다. 그곳에 유명한 셰프가 내어놓는 요리가 있다. 그림자를 골라 디디며 그 맛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설렌다. 간판도 달리지 않은 작은 흰색 대문이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려있다. 서툰 듯 예쁜 그림이 그려진 계단을 오르면 ‘오월(O’ wall)’이 진정한 식도락가를 맞이한다.최고의 음식 재료, 계절마다 달라지는 메뉴메뉴판만 펼치면 ‘선택 장애’ 증상이 생기는 사람이 있다면 ‘오월’에서는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된다. 전채 요리–샐러드–주요리–디저트가 알아서 나온다. ‘오월’은 테이블이 단 세 개만 있다. 그마저도 시간 차이를 두고 예약을 받는다. 테이블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다는 뜻이다. 예약할 때 고객은 특별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재료만 알려주면 된다. 통영은 식도락가의 낙원이라 불릴 만큼 신선한 해산물과 해초, 나물이 넘쳐난다. 주인장 김현정(46) 셰프는 매일 새벽 서호시장에서 그날 예약된 만큼만 장을 본다. 시장에서 제일 싱싱하고 물 좋은 것으로만 고르다 보니 계절마다 날씨마다 메뉴가 달라질 수밖에. 김 셰프는 통영 ‘오월’은 통영 ‘다찌(선술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오월’이 로컬 프렌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바다향이 가득, 입도 눈도 즐거운 전채 요리대중적인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 한다면 흔히 상상하는 그림들이 있을 것이다. 가게마다 비슷한 종류의 전채 요리, 면이 위주인 해물 파스타, 씹는 맛(?)이 있는 스테이크 등. 그런데~. ‘오월’에서 맨 처음 선보인 전채 요리를 보면 예상이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약간은 낯선 구성에 ‘아니 이건~!’ 눈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리안 요리에서는 보기 힘든 싱싱한 밀치(가숭어)회가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안 전채요리에 회라니! 김 셰프가 내민 접시 위에는 명란을 넣은 마스카르포네(이탈리안 크림치즈)가 동그랗게 올라간 카나페를 중심으로 밀치회, 오븐에 구운 전복, 성게 알 올린 아보카도, 게살과 양파가 들어간 멘보샤(빵 사이에 다진 새우살을 넣고 튀긴 요리)가 둘러싸고 있다. 이 한 접시에 통영의 바다가 오롯이 담겼다. 작은 전채 요리 하나에도 요리사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마스카르포네 위 눈에 보일 듯 수줍은 꽃 한 송이가 마치 섬 위에 피어있는 들꽃을 연상한다. 입에 넣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모차렐라에 크림을 첨가한 브라타(Burrata) 치즈가 소복이 담긴 샐러드, 그리고 거기서 풍기는 신선한 과일 향이 더욱 식욕을 자극한다. “오늘은 물 좋은 오징어로 만든 파스타”“오늘은 오징어가 물이 좋더라고요”라며 김 셰프가 그린 색이 감도는 요리를 내어왔다. 통오징어 두 마리가 올려져 있다. 큼지막한 키조개 관자도 압권이다. 그 사이로 바지락과 똬리를 튼 면발이 살짝 보인다. 말 그대로 진짜 해물 파스타였다.파스타를 먹으면서 처음부터 칼로 뭘 썰어보기는 처음이다. 오징어는 촉촉하면서도 탄력 있고 관자는 쫄깃하다. 비릿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입에 넣는 순간 느껴지는 신선함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이 녀석들이 팔딱팔딱 살아 있었음을 알려준다. 풍부하게 들어간 허브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오일파스타의 풍미를 산뜻하게 잡아주었고, 알맞게 삶아진 면은 겉은 부드럽고 속은 식감이 살아있다. 시각과 미각과 후각이 모두 만족해야 완벽한 요리라고 했던가. ‘고급지다’란 표현 외에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해물 파스타’는 가라! 이 집 스테이크 완전 찐~, 감탄사 절로!안심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자마자 바로 물어보았다. “여기에 특별한 숙성 방법이 있나요?”라고. 그 말에 김 셰프는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에 사 온 고기예요~.”“그렇다면 무슨 밑간을 한 건가요?”라고 되물었다. 풍부한 육즙 속에 맛을 내기 위한 어떤 특별한 조치(?)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금과 후추요”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고기를 쓰면 숙성하지 않아도 부드러우며, 별다른 양념을 쓰지 않아도 재료가 모든 맛을 내준다고 했다.오븐에서 막 꺼내 온 민어 스테이크가 식탁 위에 올랐다. 감싸고 있던 종이 포일을 잘라내자 올리브와 허브향이 훅 올라온다. 그 뒤로 감도는 고소한 민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한 점 입에 넣자 생선에서 상큼함이 느껴진다. 비린내는 전혀 없다. 역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민어에 토마토와 올리브, 타임(Thyme)과 딜(Dill)을 올리고 오븐에 익힌 것이 전부라는 설명뿐.(타임은 ‘백리향’이라고도 불리며 강력한 살균 작용을 하며 요리용 허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진정시키다’는 뜻의 딜도 생선요리에 자주 사용하는 허브다.) 여태까지 내가 먹어왔던 스테이크는 대체 뭐였을까? ‘르 꼬르동 블루’ 출신 요리사, 통영에 빠지다김 셰프는 1895년 설립된 세계적인 요리 학교 프랑스 ‘르 꼬르동 블루’를 수석 졸업했다. 이후 서울에 터를 잡고 레스토랑 ‘오월(O’ wall)’을 운영했으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5년 만에 가게를 접어야 했고, 2015년 통영국제음악당 총괄 셰프로 면접을 보러 오게 됐다. 태어나서 첫 통영 방문이었다. “통영에 도착했던 순간 무조건 여기 와서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무엇보다 시장에만 나가면 싸고 신선한 식자재가 넘쳐났어요. 서울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죠.” 그는 국제음악당을 그만두고 3년 전 서울에서 운영하던 식당 이름을 그대로 따 통영 ‘오월’의 문을 열었다. 그의 음식에 대한 철학은 확고하다. “최고의 요리사는 최고의 식자재를 찾는 사람이다. 모든 맛은 재료 본연에서 나온다. 요리사는 그저 약간만 거들뿐”이라며 겸손한 웃음을 지었다. 통영 ‘오월(O’wall)’경남 통영시 데메3길 64-12, 2층가격 3만~7만 원 코스예약필수 010-3005-4418(경남공감 2021년 7월호) 글 이지언 사진·동영상 김정민
21.07.02.지난겨울,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정사정없이 겨울수박 하우스를 초토화시켰고 날씨만큼이나 겨울수박 농가는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이에 경남도는 전국 최초로 겨울수박을 포함한 5개 농산품에 대해 정부 추경 재난지원금을 확보하고 지급한다.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 겨울수박 90% 생산지 경남‣ 코로나 영업제한 농가 직격탄‣ 500농가 100만 원씩 총 5억 원‣ 김경수 도지사 등 공무원 노력 결실 코로나19와 겨울수박이 무슨 상관?겨울수박 출하 막바지에 접어든 4월 말 함안의 한 수박농가. 여름을 방불케 하는 하우스 안에는 잘 익은 수박이 넝쿨을 따라 가득했다. 땀을 흘리며 출하작업을 하고 있던 홍재민(42) 사장을 만났다. “너무 힘들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여는 그의 하소연 속에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그대로 묻어났다. “인건비, 임대료, 퇴비, 자재비 등을 합하면 하우스 당 거의 1500만 원의 적자를 봤다”며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지난해 12월~지난 2월,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유흥주점·노래방·뷔페 등의 영업이 제한됐다. 도미노처럼 그 타격이 겨울수박 하우스를 덮쳤고 수박 가격은 한때 1/5 수준까지 곤두박질했다. 이들은 겨울수박의 주 거래처들이었기 때문이다. 겨울수박 출하기가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인 것을 생각한다면 본격 출하기에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농가를 돕자” … 공무원이 발 벗고 나서경남은 전국 겨울수박의 90% 이상을 생산한다. 겨울수박 농가가 줄줄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경남도 농정국과 도내 생산량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함안군은 비상이 걸렸다. 겨울수박뿐 아니라 화훼농가 등 코로나19의 타격을 입은 농민을 돕기 위해 담당 공무원들이 뛰기 시작했다. 실무진들이 농림축산식품부를 드나들며 현장 목소리를 전했고 소비 촉진 마케팅 비용 5000만 원을 확보했다. 농가당 재난지원금 지급도 강력히 건의했다. 농협중앙회에는 농가 대출이자 상환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설 대목이 다가오자 경남도, 시군, 생산자가 겨울수박을 팔기 위해 똘똘 뭉쳤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도 SNS를 통해 겨울수박 소비를 호소했다. 관공서, 농협, 학교, 온라인 등에서 소비 촉진 행사를 열었고 농협 하나로마트와 이마트 등 대형 마트에 겨울수박 판매 행사도 제안했다. 다행히 설날 이후 겨울수박 가격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동안의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의 몫으로 남았다. 겨울수박, 재난지원금 받다겨울수박은 경남에 치중된 작물이라는 이유로 재난지원금 지급이 반려되기를 여러 차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실무진들의 노력에 농림축산식품부가 마침내 화답했다.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겨울수박, 화훼 등 경남 대표작물 5개 품목이 피해품목으로 지정되었고 국회 추경예산을 통과해 겨울수박은 농어업분야 재난지원금 100만 원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경남도내 겨울수박 약 500농가에 5억여 원이 지급된다. 개별 작물에 대해 정부가 재난지원금을 편성해 준 것은 처음이다.경남도 농정국 농산물수급담당 김재욱 사무관의 말을 들으니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속담이 와 닿는다. “당시 함안군은 비상상황이었습니다. 함안군의 요청을 받고 실사를 나갔을 때 그 농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책상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죠. 발에 땀나도록 뛰어 이번 결실을 얻어내면서 담당 공무원의 적극성이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발로 현장을 뛰는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큰 깨달음을 준 농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합니다.” (경남공감 2021년 6월호) 글 이지언 사진 김정민
21.06.10.